긴 터널같이 암담했던 서른을 지나 마흔의 문턱에 들어선 어느 날 TV에서 개들이 입마개를 하고 가짜 먹이를 쫓아 맹렬하게 달리는 ‘도그 레이싱(dog racing)’을 보았다.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마침내 한 마리의 뛰어난 경주견이 먹잇감을 따라잡는데 성공하였다. 장내 아나운서의 흥분된 목소리, 광기 어린 관중들의 환호성에 일순간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경기장의 주인공이었던 경주견은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씁쓸히 경기장 밖으로 퇴장하였다. 그 순간 ‘경기장을 죽자 살자 달렸던 경주견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나의 삶에 오버랩(overlap) 되었다.

  ‘잘 뛰면 살고, 잘 못 뛰면 죽는다’는 잔혹하고 냉혹한 세계에서 살기 위해 뛰어야 하는 경주견처럼 죽자 살자 달려왔던 나를 돌아보았다. 그동안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기 위해,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지난 40여 년을 브레이크 없이 달려온 나를 멈추게 한 것은 TA였다. 2010년 40대 초반에 TA를 만나면서 비로소 멈추는 법을 배웠다. 멈추고 돌아보니 각본이라는 경기장에서 무수한 게임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내 모습이 보였다. 한동안 이러한 나를 직면하는 것이 무척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그 경기장으로 다시 돌아가 주인이 주는 먹잇감을 쫓아 각본 속으로 달리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다는 망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TA이론으로 무장하고 실전에서 각본과 싸우며 TA를 실천하는 진짜 ‘TA인’들을 만나면서 철옹성 같았던 나의 각본에 균열이 오기 시작했다. 나도 더 이상 ‘경기장의 개’가 아닌 각본과 맞서 싸우는 ‘경기장의 검투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경기장의 검투사가 되려면 흠씬 두들겨 맞을 것 같은 ‘취약성’을 드러내며 담대하게 뛰어들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였다.

  나의 용기를 시험하듯 작년 우리 학회 제4대 김장회 학회장님으로부터 운영위원회 총무위원장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왔다. 나는 누구보다도 총무위원장의 역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 책무에 대한 부담감으로 또다시 각본 속으로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나는 ‘경기장의 개’로 살 것인가  아니면 ‘경기장의 검투사’로 살 것인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 순간 Hear&Now에서 ‘경기장의 검투사’가 되기로 나의 선택권(Option)을 사용했으며, 흠뻑 두들겨 맞을 각오로 총무위원장직을 수락하였다.

  검투사의 경기장에는 김장회 학회장님을 비롯하여 TA로 무장한 15명의 검투사들이 운영위원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16명의 검투사들은 원팀(One Team)이 되어 학회 시스템을 재정비하고, 만연해 있던 조직의 CP와 담대하게 맞서 싸우며, 지속 성장 가능한 학회를 위해 지혜와 역량을 모아 멸사봉공의 마음으로 자기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 전국 45개 지부학회장님들의 든든한 후방 지원이 있었고, 사무국 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학회다운 학회로 성장하였다. 무엇보다도 학술대회가 개최될 때마다 자율성과 친밀성으로 봉사해준 전국 지부학회의 사무국장, 중앙대지부 학회원, 경상대지부 학회원의 ‘분홍빛 스카프’ 팀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한다.

  땀범벅이 되고 흙먼지를 묻혀 가면서 지나온 2년은 ‘경기장의 개’가 아닌 각본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더 강한 ‘경기장의 검투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어서 감사하고 영광된 시간이었다.